미국 대중음악계의 상징적 존재였던 가수이자 피아니스트 냇 킹 콜이 1965년 2월 15일 새벽 폐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45세. 부드럽고 벨벳 같은 음색으로 인종과 장르의 경계를 허물었던 그의 죽음은 단순한 한 예술가의 퇴장이 아니라, 미국 문화사의 한 장이 조용히 막을 내린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시카고의 재즈 클럽에서 피아니스트로 경력을 시작한 그는 1940년대 초 ‘트리오’ 편성 연주로 주목받았다. 당시 재즈계는 기교 경쟁이 치열했지만, 콜은 화려함 대신 절제된 터치와 세련된 코드 진행으로 새로운 스타일을 제시했다. 음악 평론가들은 그를 “건반 위에서 속삭이는 남자”라고 불렀다.
전환점은 보컬이었다. 연주 중 관객 요청으로 노래를 부른 것이 계기가 되었고, 이후 발표한 히트곡 Mona Lisa와 Unforgettable는 라디오와 음반 시장을 동시에 장악했다. 그의 목소리는 재즈 팬뿐 아니라 팝 음악을 듣던 백인 중산층 청중까지 사로잡으며 “크로스오버”라는 개념을 대중화했다.1950년대 미국은 여전히 인종 분리가 일상적이던 시기였다. 그런 가운데 그는 흑인 가수로서는 드물게 전국 방송 프로그램 The Nat King Cole Show의 진행을 맡았다. 그러나 높은 시청률에도 불구하고 광고주들이 스폰서를 꺼리면서 프로그램은 1년 만에 종영됐다. 콜은 당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가가 준비되지 않았을 뿐, 음악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이 발언은 훗날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주니어가 연설에서 인용할 만큼 상징적인 문장으로 남았다.가수 프랭크 시나트라는 그의 별세 소식 직후 성명을 내고 “그는 가수 중 가장 세련된 가수였으며, 인간 중 가장 품위 있는 인간이었다”라고 애도했다. 음악계는 물론 할리우드와 방송계에서도 추모 메시지가 이어지고 있다.냇 킹 콜은 단순히 인기 가수가 아니었다. 그는 백인 청중이 흑인 아티스트를 ‘주류 스타’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앞당긴 상징적 인물이었다. 비평가들은 그의 성공이 이후 레이 찰스, 스티비 원더 같은 후배들에게 길을 열었다고 평가한다.
1965년 2월 15일, 미국 전역의 라디오 방송국들은 그의 노래를 연속으로 틀며 추모 방송을 편성했다. 그의 목소리는 멈췄지만, 그 음색이 남긴 울림은 여전히 전파를 타고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