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김천의 산과 들 사이를 흐르는 무릉천에는 오랜 세월 사람의 손길과 불의 숨결이 스며 있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 속에서도 김천의 흙은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 누군가는 오래전 사라진 이야기라고 말하지만, 흙은 결코 역사를 잊지 않는다. 뜨거운 불길 속에서 수천 번의 숨을 참고 견뎌낸 도자기처럼, 김천의 도자 문화 또한 세월 속에서 조용히 살아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천은 내륙의 도시를 넘어 예로부터 사람과 물자가 활발히 오가던 교통과 교역의 중심지였다.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열린 통로이기도 했다. 특히 구성면 임천리와 월계리를 가로지르는 무릉천 일대는 오래전부터 사기그릇을 굽던 장인들의 삶터였다. 지금도 남아 있는 옛 가마터와 ‘압제당’의 흔적은, 이곳이 생활 도자의 생산지를 넘어 지역 문화의 정신적 중심지였음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김천시 구성면 임천리 일대는 한때 도자기 파편이 곳곳에 산재해 있던 백자의 터전이었다. 구전에 따르면 조선 관요에서 활동하던 사기장 김봉대·김춘성·이흥원 등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도자를 굽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곳을 ‘사기점(沙器店)’이라 불렀고, 긴 세월을 지나며 마을 이름은 ‘사점(沙店)’으로 줄어들었다. 지명은 결코 우연히 생겨나지 않는다. 한 시대 사람들의 노동과 생활, 그리고 기억이 축적되어 이름이 된다. ‘사점’이라는 이름은 곧 이 지역이 얼마나 활발한 도자 생산지였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역사다. 무릉천 물길을 따라 장인들은 흙을 구하고, 장작을 모으고, 물을 길어다 쓰며 삶과 작업을 함께 이어갔다. 도자는 상품을 넘어 사람들의 밥상과 일상, 그리고 삶의 온기를 담아내는 생활문화였다. 그 김천 도자의 중심에 경상북도 무형유산 사기장 ‘토인(陶人)’ 백영규 선생이 있다. 백영규 선생은 다섯 살이던 1947년, 아버지를 따라 구성 임천으로 들어왔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의 삶은 이미 흙과 불 속에 놓여 있었다. 당시 김천에는 봉통 아홉 개짜리 대형 등요가마가 운영될 만큼 도자 산업이 활발했다. 관요 출신 장인들과 수십 명의 인부들이 함께 불을 지피며 거대한 가마를 지켜냈다. 그곳은 생산 현장을 넘어 흙과 기술, 그리고 인간의 삶이 함께 숨 쉬던 공동체의 공간이었다. 백영규 선생이 특별한 이유는 뛰어난 기술을 익힌 장인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사라져가는 기억까지 품고 있었던 마지막 세대였다. 생전에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가마 근처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모래 하나 섞이지 않은 최상의 백토가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 백토 산지가 지금은 기록 속에서도 희미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백영규 선생의 기억 속에는 광산의 위치와 매장량까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결국 한 사람의 기억이 지역의 역사를 지켜낸 셈이다. 그 기억 덕분에 김천이 백자의 중요한 산지였다는 사실 또한 다시 조명되고 있다. 백자는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오래 바라볼수록 깊다. 장작가마 속 수천 도의 불길을 견디며 탄생하는 백자는 절제와 인내의 미학을 담고 있다. 조금만 욕심을 내도 깨지고, 불의 흐름을 읽지 못하면 뒤틀린다. 그래서 백자는 기술을 넘어 마음의 작업이다.백자의 흰빛은 욕심을 덜어낸 절제의 아름다움이며, 장작가마의 불길은 인간의 기다림과 인내를 상징한다. 일그러짐조차 견뎌낸 뒤에야 비로소 완성되는 그 표면은 어쩌면 우리 민족의 삶과도 닮아 있다. 화려하지 않지만 깊고, 소박하지만 오래 바라볼수록 아름다운 존재. 그것이 바로 백자다.세월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지만, 김천 도자의 불씨는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토인 백영규 선생에게 이어져 오던 백자의 기술과 정신은 오늘날 “도문요”의 김대철 명인에게 전승되고 있다.도문요는 전승 도자기의 맥을 계승하며 장작가마 방식만을 고수해온 전통 도자 브랜드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통 방식 그대로 흙을 수비하고, 천연 재료로 유약을 만들어 사용하며, 자연의 숨결을 천천히 그릇 속에 담아내고 있다. 빠른 생산과 효율이 우선되는 시대 속에서도 도문요는 느림의 가치를 지켜내며, 불과 흙, 바람과 재가 남긴 자연의 흔적을 작품 안에 고스란히 새겨 넣고 있다.그릇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수없이 손으로 흙을 다듬고, 장작가마의 불길을 밤새 지켜내며, 시간과 정성을 견뎌내는 과정은 제작을 넘어선다. 그것은 전통의 아름다움을 오늘의 삶 속에 되살리는 작업이며, 사라져가는 한국 도자의 정신을 이어가는 수행과도 같은 길이다.김대철 명인은 옛 전통을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그는 전통 장작가마의 은은한 불빛 아래에서 옛 기법을 지켜내면서도, 현대의 감성과 시대의 미감을 함께 담아내고 있다. 빠름과 효율이 미덕이 된 시대지만 그는 여전히 기다림의 가치를 믿는다. 가마의 온도를 몸으로 느끼고, 불꽃의 색으로 시간을 읽으며, 흙의 숨결을 손끝으로 헤아린다.그의 작업은 제작을 넘어 과거와 현재를 이어 붙이는 일이며, 사라져가는 시간을 다시 살아 숨 쉬게 하는 일이다. 기술 이전에 철학이며, 노동 이전에 수행에 가까운 작업이다.무릉천 물소리 사이로 스며들던 장작 타는 냄새, 가마 속 붉은 불빛, 그리고 백자의 고요한 흰빛은 여전히 김천의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오늘의 김천은 그 시간을 얼마나 품어내고 있는지 되묻게 된다.한 시대를 지탱했던 도공들의 삶과 가마터는 점점 흔적만 남아가고, 수백 년 이어온 도자의 정신은 개발과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서서히 변두리로 밀려나고 있다. 문화와 예술은 도시의 뿌리이자 정신임에도, 우리는 그것을 미래 자산으로 바라보기보다 과거의 유물처럼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전통은 저절로 보존되지 않는다. 기억하려는 사람과 지켜내려는 의지가 있을 때만 살아남는다. 하지만 지금 김천의 현실은 어떠한가. 오래된 가마터와 도자 문화의 역사적 가치가 제대로 기록되고 있는지, 장인들의 삶과 기술이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고 있는지, 지역 문화유산을 도시의 정체성으로 키워내려는 진지한 고민이 존재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문화는 눈앞의 경제 논리로만 판단할 수 없는 도시의 품격이다. 전통 예술이 사라진 자리에는 결국 획일화된 풍경과 기억 없는 도시만 남게 된다. 김천 도자의 역사는 옛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김천이라는 도시가 지나온 시간이며, 앞으로도 반드시 지켜야 할 정신적 유산이다.무릉천의 물소리는 아직 흐르고 있다. 그러나 그 물소리 속에 담긴 장인들의 숨결까지 사라지게 할 것인지, 아니면 김천의 미래 문화자산으로 다시 되살려낼 것인지는 이제 우리 모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최종편집: 2026-06-15 18: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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